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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페이크 디지털 성범죄, 삭제되지 않는 상처: 미국과 한국의 법적 대응
1. 서론: 삭제되지 않는 상처
2025년 봄, 한 여고생의 SNS 프로필이 모르는 사람들의 메시지로 도배되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합성된 노골적인 영상이 텔레그램과 웹하드, 심지어 해외 성인 사이트에까지 퍼졌던 것입니다. 영상은 마치 실제인 것처럼 정교했고, 삭제 요청도 소용없었습니다. "지웠다"는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영상은 복제되고, 공유되고, 다시 업로드되었습니다. 그녀는 학교에 나가지 못했고, 가족과 함께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상은 여전히 인터넷 어딘가에 살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화에 나오는 픽션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디지털 불법행위의 현실입니다. 딥페이크 기술은 놀라운 진보를 이뤘지만, 그 기술이 향하는 방향은 반드시 윤리적이거나 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성적 목적의 딥페이크는 명백한 인격권 침해이자, 정신적 손해를 수반하는 범죄입니다. 문제는 이 피해에 대해 법이 충분히 대응하고 있는가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딥페이크와 같은 디지털 불법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법적 책임의 대상이 되는지를 살펴보고, 미국과 한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르게 다루고 있는지 비교 분석해 보겠습니다. 피해는 점점 정교해지고, 법은 여전히 뒤쫓고 있습니다. 하지만 늦어도 반드시 도착해야 할 정의가 있습니다.
2. 디지털 불법행위란 무엇인가
디지털 불법행위는 단순한 기술적 위반을 넘어서, 개인의 권리와 존엄을 디지털 환경에서 침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는 오프라인에서 발생하는 명예훼손, 사생활 침해, 정신적 손해 등의 불법행위가 온라인 공간에서, 디지털 기술을 매개로 발생한 새로운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유형
- 딥페이크(Deepfake) 성영상물 생성 및 유포
인공지능 기술로 타인의 얼굴을 합성하여 성적 콘텐츠에 삽입하는 행위. 실제 피해자가 성행위에 참여한 적이 없음에도, 마치 참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유포함. - 불법촬영물 유포 / 리벤지 포르노
당사자의 동의 없이 촬영된 영상이나 사진, 또는 과거 연인 간의 사적 영상 등을 보복 목적 등으로 유출하는 행위. - 디지털 스토킹 및 해킹 통한 사생활 침해
SNS, 메신저 등을 이용한 감시, 위치 추적, 비밀번호 탈취를 통한 메일·사진 열람 등. - 합성 사진, 조작 캡처 유포
실제 하지 않은 발언이나 행동을 했다고 오해하게 만드는 이미지, 게시물 합성. - 웹하드 및 텔레그램 유포 구조
디지털 성범죄물이 조직적으로 유통되는 구조적 플랫폼 문제. (n 번 방 사태 참고)
이러한 행위들은 전통적인 불법행위와 달리, “삭제가 어렵고, 피해가 반복되며, 가해자를 특정하기 어려운” 특성을 갖습니다. 즉, 피해자는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 “지속적 고통”을 겪게 되며, 이는 정신적 손해를 극대화합니다.
3. 미국과 한국의 법적 대응 비교
미국의 대응: 표현의 자유 vs 피해자 보호
Christopher Kohls, et al. v. Keith Ellison, et al., U.S. District Court of Minnesota, 0:24-cv-03754
2024년, 미네소타주의 정치 풍자 유튜버 Christopher Kohls는 주 하원의원 Mary Franson과 함께 딥페이크 규제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정치 풍자를 위해 딥페이크 기술을 사용했을 뿐, 악의적인 음란물이나 명예훼손 목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법은 우리를 가해자로 만들고 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술 논쟁을 넘어, 미국 사회가 딥페이크를 바라보는 철학적 경계선을 드러낸 판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연방 법원은 이 사건에서 딥페이크 규제의 필요성과 표현의 자유 보장 사이의 균형 문제를 놓고 치열한 법적 공방을 이어가고 있으며, AI 시대의 헌법적 가치 기준을 세우는 시험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미국은 피해자 보호도 중요하지만, 언론과 표현의 자유라는 수정헌법 제1조의 가치 또한 무겁게 다루기 때문에 법의 반응이 빠르기보다는 조심스럽고 정교합니다.
한국의 대응: 강화된 처벌,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상처
서울중앙지방법원 2024고합1234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법 역사상 가장 무거운 딥페이크 유포 형량이 선고된 사건으로 기록됐습니다.
피고인 박 씨와 강 씨는 서울대학교 여성 동문 커뮤니티에서 수집한 사진을 기반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합성한 음란물을 약 2년간 텔레그램을 통해 유포했습니다. 피해자는 무려 61명, 그중 절반 이상이 본인의 영상이 유포되었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한 피해자는 결혼을 앞두고 영상이 확산되었고, 결국 파혼이라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또 다른 피해자는 영상을 본 회사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아 퇴사에 이르렀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은 “단순 호기심이었다”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 행위를 계획적이며 조직적인 성범죄로 판단했습니다. 박 씨에게는 징역 10년, 강 씨에게는 징역 4년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피해자들의 영상은 여전히 웹하드나 음란 사이트에 퍼져 있으며, 삭제 요청은 미비한 대응에 부딪혀 좌절되기 일쑤입니다.
한국 사회는 딥페이크 같은 신기술 범죄에 대해서는 형사 처벌을 빠르게 강화했지만,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은 여전히 최소 수준이며, 피해자의 사회 복귀나 심리적 회복을 위한 제도는 부실하기만 합니다. 피해자가 다시 일상을 되찾고, 사회에 온전히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법적 처벌을 넘어, 실질적 회복으로
미국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와 피해자 보호 사이에서 법적 기준을 설정하는 데 고심하고 있고, 한국은 처벌 강화를 빠르게 도입했지만 피해자의 회복을 위한 보호체계가 미비합니다.
딥페이크는 단순한 영상 합성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무기입니다. 법은 이제 처벌 중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피해자의 일상을 되돌려주는 데 초점을 맞춘 회복적 법 시스템을 고민해야 합니다.
4. 마음에 남은 상처는 왜 법으로 낫지 않는가
지수는 평범한 29세 회사원이었습니다. 성실하고 조용한 성격의 그녀는 SNS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고, 평소 사진 찍는 것조차 꺼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에게서 날아온 한 통의 메시지. “너 이 영상 본 적 있어?” 영상 속 여성은 지수와 똑같이 생긴 얼굴로 낯선 남성과 성관계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목소리도, 표정도 너무 닮아 있어서 친구조차 한참을 의심했다고 했습니다.
지수는 영상 제작자가 누군지, 어디서 유출됐는지도 모르는 채 회사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영상은 텔레그램을 타고, 웹하드와 해외 사이트까지 퍼졌습니다. 영상 삭제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우리는 업로더가 아닙니다”라는 차가운 문장뿐이었습니다. 지수는 병원에서 공황장애와 불면증 진단을 받고 심리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법원에 낸 민사 소송에서는 ‘피해가 확정되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일부 기각이 나왔습니다. 실제 촬영이 아니며 합성이라는 점, 그리고 영상에 이름이나 계정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결국 법원은 위자료로 고작 300만 원을 인정했습니다. 지수는 변호사에게 물었습니다. “제 삶은 이미 망가졌는데, 고작 이 정도인가요?”
반면 미국의 사례에서는 딥페이크 영상 유포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수십만 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법원은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과 향후 사회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그 피해를 정량적으로 계산합니다. 이는 단순한 ‘벌’의 개념이 아니라, 피해자의 삶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도록 보상해야 한다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에 더 가까운 개념입니다.
한국에서는 형사처벌은 점점 강화되고 있지만, 민사에서는 여전히 정신적 손해의 크기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증거를 요구하지만, 그 고통은 기록되지 않고, 증명되지 않으며, 결국 인정받지 못합니다.
법은 냉정해야 하지만, 때로는 따뜻한 감수성을 동반할 때 진짜 정의가 됩니다. 피해자들이 “잊어라”는 말 대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5.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의 법
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빠르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10년 전에는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했던 일이 이제는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실행할 수 있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딥페이크 영상 하나를 만들기 위해 전문가가 필요했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앱 하나만으로도 누구나 타인의 얼굴을 합성할 수 있습니다. 법은 이 빠른 기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이 반드시 기술보다 빨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법이 추구해야 할 방향은 속도가 아니라 사람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 법은 기술보다 앞서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딥페이크 영상의 피해자가 겪는 고통은 단지 수치심이나 분노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회적 관계의 단절, 직장의 불이익, 가족의 해체, 그리고 정신적 붕괴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피해자는 삭제되지 않는 영상보다, 삭제되지 않는 감정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디지털 범죄에 대응하는 미래의 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 이 피해자는 자신의 삶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 법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듣고 있는가?
- 형사적 처벌만으로 이 사회적 상처가 치유될 수 있는가?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AI 생성물 표시 의무화, 피해자 지원 펀드 마련, 그리고 신속삭제법 등 실질적 제도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딥페이크 피해자 보호센터 확대,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 책임 강화, 피해 영상 전담 삭제 시스템 구축 등 구체적인 행동이 요구됩니다. 딥페이크와 같은 디지털 성범죄는 단순히 처벌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삶을 회복시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법적 장치가 함께 마련되어야 합니다. 기술은 빠르게 진화하고 있지만, 법은 그보다 앞서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피해자가 혼자 싸우지 않도록, 이제는 사회 전체가 함께 책임져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