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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행위법 시리즈 – 제조물 책임 편: 결함 있는 제품, 누가 책임지는가?
1. 서론
매일 아침 손에 쥐는 전기면도기, 피부에 바르는 화장품, 아이가 마시는 분유,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삶의 일부이며, 신뢰를 바탕으로 사용하는 물건들입니다. 우리는 매뉴얼을 정독하지 않아도, 품질 보증서를 끝까지 읽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라는 믿음으로 그것들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가끔, 그 신뢰가 깨질 때가 있습니다. 헤어드라이어가 폭발하고, 핸드크림에서 이상한 피부 반응이 나타나고,
새로 산 전자담배가 입술을 덮칠 정도로 터져버리는 순간, 우리는 묻습니다.
"이건 누구의 잘못인가요?", "이 손해는 누가 감당해야 하는 건가요?"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제조물 책임(상품 책임)’이라는 법의 틀입니다. 제품 자체에 결함이 있었을 때, 또는 소비자가 사용할 수 있도록 제대로 안내하지 않았을 때, 그 손해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법적 책임이 수반되는 사건이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미국과 한국의 법 체계가 제품의 결함, 소비자의 피해, 제조자의 책임을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 제조물 책임의 개념과 성립 요건
제조물 책임(Product Liability)란?
제조물 책임은 소비자가 사용한 제품에 결함이 있어 신체적, 재산적 손해를 입었을 경우 그 책임을 제조사나 판매자가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이 책임은 단순한 도의적 사과가 아니라, 법적으로 인정되는 손해배상 의무로 연결됩니다.
미국과 한국 모두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제조자의 과실이 없어도 결함 그 자체만으로도 책임이 성립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과실 책임(strict liability)의 개념입니다.
제조물 책임이 성립되기 위한 3대 요건
- 결함의 존재
- 제품이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안전성을 갖추지 못했을 경우
- 예: 배터리 과열로 스마트폰이 폭발한 경우
- 손해 발생
- 제품 사용으로 인해 사용자의 신체나 재산에 손해가 발생해야 함
- 예: 화장품으로 인해 피부염,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 손상
- 인과관계
- 손해가 제품의 결함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함
- 예: 단순 감기인지, 가습기 살균제 때문인지 구분 필요
결함의 유형 (3가지로 나뉩니다)
- 제조상의 결함 (Manufacturing Defect)
- 공정상의 실수로 특정 제품에만 문제가 생긴 경우
- 예: 한 개의 유리병에 균열이 있어 터진 경우
- 설계상의 결함 (Design Defect)
- 설계 자체가 위험해서 모든 제품이 위험을 내포한 경우
- 예: 전자담배의 구조상 배터리가 과열되기 쉬운 구조
- 표시상의 결함 (Failure to Warn)
- 올바른 사용법이나 경고가 부족한 경우
- 예: 알레르기 유발 성분이 포함됐지만 라벨에 표시되지 않은 화장품
미국의 특징
- 상품책임은 무과실 책임 원칙에 따라 제조자의 ‘잘못’이 없어도 결함이 있으면 책임을 집니다.
- 각 주(state)마다 기준은 다르지만, 소비자 보호에 매우 적극적입니다.
- 피해자 중심의 입증 구조를 마련하기 위해 집단소송(class action)도 활발히 이루어집니다.
한국의 특징
- 2000년에 제조물 책임법 제정
- 일정한 결함이 입증되면 제조자, 수입업자, 판매자에게 손해배상 책임 발생
- 단, 징벌적 손해배상은 제한적이고, 피해자가 입증 책임을 부담해야 하는 구조는 여전히 유지됨
이처럼 상품책임은 단순히 “누가 잘못했느냐”보다 “소비자가 상식적인 신뢰를 가지고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3. 미국 판례 – Liebeck v. McDonald’s (1994)
“그저 커피를 쏟았을 뿐인데, 왜 수십억 원의 손해배상이 나왔을까?”
1992년, 뉴멕시코. 79세의 여성 스텔라 리백(Stella Liebeck)은 손녀가 몰던 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맥도날드 드라이브스루에서 뜨거운 커피를 주문했고, 차는 멈춰 있는 상태였지만 컵 홀더가 없어, 무릎 위에 컵을 놓은 채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 커피가 그대로 스텔라의 허벅지와 사타구니 부위에 쏟아졌고, 그녀는 3도 화상을 입어 피부이식 수술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그녀가 맥도날드를 고소한 이유는 단순했다:
"커피가 너무 뜨거웠고 이 위험에 대해 경고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많은 언론이 이 사건을 비웃었습니다. “커피는 원래 뜨거운 거 아냐?”, “그냥 실수로 엎질렀을 뿐인데 무슨 소송이야?”
하지만 법정에서 밝혀진 사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재판에서 드러난 진실
- 맥도널드는 커피를 평균 82~88℃로 제공하고 있었음
- 3도 화상은 70℃ 이상의 액체에 단 3초 만에 발생할 수 있음
- 맥도널드는 과거에도 700건 이상의 유사 화상 사례를 알고 있었음
- 스텔라는 처음엔 병원비 2만 달러만 청구했으나, 맥도널드가 이를 거부함
결국 배심원단은 맥도널드에 대해 2.7백만 달러(약 30억 원)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명령했고, 이는 이후 감액되어 합의되었지만, 사건의 상징성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이 판례가 말해주는 핵심
- “예상할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지 않았다면, 제조자의 책임이다.”
→ 단순히 제품이 기능을 수행했다고 해서, 모든 책임이 면제되진 않습니다. - “소비자가 제품의 위험성을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었는가?”
→ 경고 부족은 표시상 결함(failure to warn)으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 “징벌적 손해배상은 반복적/악의적 행위에 대한 경고 수단이다.”
→ 맥도날드는 과거 사고를 알고도 방치했고, 그 결과 배상액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습니다.
이 사건은 지금도 미국 로스쿨 교재에 실리는 대표적인 상품책임 사례이며,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결코 사소하지 않았던 소비자 권리”에 대해 경종을 울린 판례로 기억됩니다.
4. 한국 판례 – 대법원 2017도12537 가습기 살균제 사건
2000년대 초반, 많은 가정에서는 겨울철 건조한 공기를 해결하기 위해 가습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더 깨끗한 공기를 위해,
“세균을 없애준다”는 문구가 인쇄된 가습기 살균제를 함께 사용했죠. 특히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필수템’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아이들이 이유 없이 호흡곤란을 겪고, 산소마스크를 써도 호전되지 않았으며,
일부 임산부는 출산 직후 원인 모를 폐손상으로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원인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믿고 사용하던 가습기 살균제였다는 것을.
2011년, 질병관리본부와 민간 연구자들이 가습기 살균제와 폐 손상 사이의 연관성을 밝혀냈고, 수많은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제품에는 아무런 경고 표시도 없었고, 성분인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는 원래 공업용 살균제에 쓰이던 화학물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가정용”, “안전함”, “소독 효과”라는 광고가 수년간 이어졌습니다.
법원의 판단은?
- 제조사와 판매사는 표시상 결함(Failure to Warn) 및 설계 결함 모두 책임 인정
- 형사재판에서 업체 대표에게 징역형 선고, 일부는 실형 확정
- 민사에서는 피해자들에게 수억 원 규모의 위자료 및 손해배상 판결
특히 대법원은 2022년 판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제조사는 안전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그 의무를 게을리한 경유 설계와 표시상의 결함으로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
이 사건이 남긴 법적·사회적 의미
- 무지한 소비자는 법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 제품의 전문성, 화학성분, 복잡한 구조는 소비자가 스스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 경고의무는 '말만 했는가'가 아니라, '이해할 수 있도록 말했는가'이다.
→ 라벨에 작게 적은 경고는 책임 회피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 기업의 침묵은 죄가 될 수 있다.
→ 위험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면, 법은 침묵을 ‘고의’로 해석합니다.
이 판례는 한국 사회 전체에 소비자 보호의 경각심을 일으킨 계기였으며, 이후 제조물 책임법 개정과 안전 표시 의무 강화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5. 입증 책임과 소비자 보호 장치의 차이
“내가 증명해야 하나요, 아니면 그들이 해명해야 하나요?”
제품으로 인해 다쳤을 때, 피해자가 법정에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장벽은 단 하나입니다.
"이게 그 제품 때문이라는 걸, 당신이 증명할 수 있나요?"
미국 : 제조사가 증명해야 하는 구조 (소비자 중심)
미국 상품책임 제도에서는 원칙적으로 피해자가 결함의 존재와 손해 발생을 입증해야 하지만, 일단 일정 요건이 충족되면 입증 책임이 제조사로 전환됩니다. 즉, 소비자가 “이 제품에 문제가 있었고, 그로 인해 다쳤다”는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면 그다음부터는 제조사가 다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 제품이 정상적으로 제조되었고,
- 소비자가 잘못 사용하지 않았으며,
- 위험을 충분히 경고했다는 것
그리고 미국은 다음과 같은 소비자 보호 장치가 매우 발달되어 있습니다:
- Class Action (집단소송): 여러 명의 피해자가 함께 소송 제기 가능
- Punitive Damages (징벌적 배상): 반복적·악의적 기업 행위에 대한 강력한 제재
- 소비자안전위원회(CPSC) 등의 정부기관이 제품 리콜 및 정보공개 주도
이런 구조는 “입증의 어려움을 줄이고, 소비자 중심의 판단을 유도”하는 장치입니다.
한국: 여전히 소비자에게 무거운 입증 책임
한국도 제조물 책임법을 통해 일정 부분 입증책임의 전환을 인정하고 있지만, 실무상으로는 여전히 피해자가 다음을 직접 증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제품에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
- 그 결함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
특히 다음과 같은 경우 어려움이 큽니다:
- 피해자가 혼자일 경우 (집단소송이 불가능하거나 미흡한 경우)
- 기술적, 과학적 정보가 제조사에 편중되어 있을 경우
- 사용자의 일부 과실이 존재할 경우 (예: 사용법을 정확히 따르지 않음)
한국의 개선 움직임
다행히도 최근에는 다음과 같은 소비자 보호 확대 조치들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 일부 법령에서 징벌적 손해배상 확대 (예: 개인정보보호, 의료사고 등)
- 공익소송제도 도입 논의
- 제품안전정보센터, 식약처, 공정위를 통한 리콜 정보 제공 강화
결국 이 파트의 핵심은 명확합니다:
“입증 책임이 오직 피해자에게만 있다면, 많은 피해자들은 법정에 가기도 전에 포기하게 됩니다.”
구분 | 미국 | 한국 |
---|---|---|
입증 책임 | 초기만 소비자, 이후 제조사로 전환 | 소비자가 대부분 입증 부담 |
소비자 보호 제도 | Class Action, 징벌적 배상, CPSC 등 | 제품안전정보센터, 공정위 리콜 안내 |
보상 범위 | 정신적 손해, 장래 손실 등 포괄적 | 직접 손해 중심, 위자료는 제한적 |
6. 자주 묻는 질문 (Q&A)
Q1. 사용설명서를 제대로 안 읽고 다쳤어요. 이럴 땐 제 책임인가요?
미국:
제품에 위험이 내포되어 있었고, 제조사가 이를 충분히 경고하지 않았다면 소비자의 일부 과실이 있더라도 제조사의 책임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한국:
사용자의 부주의가 크다면 과실상계로 손해배상액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조사에 경고의무 부족이 있으면 책임 일부는 여전히 인정됩니다.
Q2. 포장을 뜯었을 뿐인데 손이 베였어요. 누구 책임인가요?
미국:
포장이 지나치게 날카롭거나 잘못 설계되어 있다면 설계상의 결함으로 판단되어 제조사가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한국:
실제 사례로 포장 칼, 플라스틱 병뚜껑 등에서 손가락이 베인 경우, 제품에 예상 가능하고 회피할 수 없는 위험성이 있다면 책임이 인정됩니다.
Q3. 사용 후 부작용이 나타났지만 제품엔 아무 설명이 없었어요.
미국:
Failure to warn, 즉 경고의무 위반으로 제조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특히 건강보조식품, 의약품, 화장품의 경우 경고 부족은 중대한 결함으로 간주됩니다.
한국:
표시·광고법이나 제조물책임법 위반으로 손해배상이 가능하며, 최근 화장품이나 약물 부작용 사건에서 실제로 위자료가 인정된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Q4. 제품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설명이 너무 불친절해요. 법적 책임이 있을까요?
미국:
그 설명 부족으로 인한 사용자의 오해 또는 오용으로 사고가 났다면 표시상의 결함(failure to instruct)으로 간주되어 책임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한국:
소비자가 제품을 “합리적으로 오해할 수 있었던 수준”이라면 설명 부족이 과실로 인정되어 일정 책임이 발생합니다.
Q5. 제품 이상은 있었지만, 제가 일부 실수한 것도 사실입니다. 배상 못 받는 건가요?
미국:
소비자의 일부 책임이 인정돼도 제조사의 과실이 크면 비율에 따라 손해배상이 조정됩니다. 이를 비교과실제(Comparative Fault)라고 부릅니다.
한국:
마찬가지로 과실상계가 적용됩니다. 즉, 사용자의 잘못이 일부 있다면 그만큼 손해배상 금액이 줄어들지만, 책임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7. 결론
우리는 매일 물건을 만집니다. 손에 쥐는 커피컵, 가정용 가습기, 스마트폰, 크림 하나까지,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신뢰의 계약이 담겨 있습니다. “이 물건은 나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신뢰가 무너졌을 때, 법은 단순히 사고의 원인을 따지는 것을 넘어서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미국은 소비자의 안전을 ‘권리’로 규정하고, 기업에게는 그 권리를 지킬 의무를 법적으로 부여합니다. 경고를 하지 않았다면? 예상 가능한 위험을 알리지 않았다면? 그 자체로 책임이 성립됩니다. 한국은 이제 점차 그 기준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이후, 사회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모르고 썼다는 것이 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상품책임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물건과 맺는 약속이며, 법이 서명해주는 공적 보증서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제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위험을 숨기지 말아 달라고, 실수했다면 말해달라고, 그리고 그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 달라고 말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