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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행위법 시리즈: 미국과 한국 명예훼손법 비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말 한마디가 오히려 천만 원짜리 손해배상으로 이어지는 세상입니다. 특히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일상이 된 지금, 명예훼손 (Defamation) 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명예훼손'은 정확히 무엇이며, 어떤 경우에 법적 처벌을 받게 될까요? 명예훼손은 타인의 사회적 평가를 저해할 만한 허위사실이나 사실을 적시해 제3자에게 전달하고, 그로 인해 피해자의 평판을 실질적으로 해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미국과 한국 모두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관련 법률을 두고 있지만, 구성 요건이나 처벌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명예훼손의 개념과 법적 기준을 먼저 짚고, 대표적인 판례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한국의 접근 방식 차이를 드라마처럼 흥미롭게 풀어보겠습니다.
1. 명예훼손의 구성요건 비교: "무엇이 처벌의 기준이 되는가"
명예훼손은 단순히 상대방에게 기분 나쁜 말을 했다고 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적으로 명예훼손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요건을 충족해야 하며, 국가별로 그 기준이 상이합니다.
미국: 미국에서는 명예훼손이 성립하려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1) 허위의 사실이어야 하며, (2) 그 사실이 제3자에게 전달되어야 하고, (3) 피해자의 명예나 평판에 손해를 입혀야 하며, (4) 피해자가 손해를 실제로 입었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여기에 공적 인물(public figure)이나 공무원(public official)인 경우에는 '실질적 악의(actual malice)'까지 입증해야 합니다. 이는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되, 악의적인 허위 주장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는 헌법적 균형에 따른 조치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에서는 사실을 말한 경우 일반적으로 명예훼손이 성립하지 않지만, 성적인 사생활(예: 성관계 사실, 성매매 혐의 등)에 관한 사실이라면 예외적으로 '프라이버시 침해'와 결합해 명예훼손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아무리 사실이어도 내용 자체가 지나치게 사적인 경우에는 보호받지 못합니다.
한국: 한국은 명예훼손에 대해 상대적으로 엄격한 입장을 취합니다.
형법 제307조에 따르면, 사실을 적시하더라도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백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으며, 허위사실의 경우에는 형량이 더 높아집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실적시 명예훼손"도 형사처벌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즉, 말한 내용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누군가의 사회적 평가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면 형사적으로 책임질 수 있습니다.
또한 정보통신망법 제70조는 인터넷, 블로그, SNS와 같은 매체를 통한 명예훼손에 대해 별도로 규정하고 있어 온라인 명예훼손의 경우 가중처벌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연예인, 인플루언서, 정치인들이 악성 댓글이나 허위 루머 유포에 대해 형사고소를 진행하고 있으며, 그중 상당수가 벌금형이나 징역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명예훼손의 법적 요건을 실제로 어떻게 판단하는지, 주요 판례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 미국: "뉴욕타임즈 vs. 설리반 (New York Times Co. v. Sullivan, 376 U.S. 254, 1964)"
1960년,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이 한창일 때, 뉴욕타임스에는 전면 광고 하나가 실립니다. 제목은 "Heed Their Rising Voices(그들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라)". 이 광고는 시민권 운동가들이 경찰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현실을 고발하고, 이들을 지지해 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광고 안의 몇몇 문장이었습니다. "경찰이 평화롭게 시위하던 학생들에게 야만적으로 대했다", "경찰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퇴출을 획책했다"는 등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된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광고 속에는 어떤 경찰의 이름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의 경찰국장, L.B. 설리반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광고의 내용 속 주체라고 주장하며 뉴욕타임즈를 상대로 50만 달러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합니다. 하급심은 설리반의 손을 들어주고 배상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뉴욕타임즈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미국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갔고, 1964년 대법원은 역사적인 판결을 내립니다. "공적 인물은 자신에 대한 명예훼손을 입증하려면 단순한 허위사실뿐만 아니라, 그 허위가 '악의적으로' 작성되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언론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명예훼손의 입증 기준을 대폭 상향한 이 판결은 오늘날까지도 미국 표현의 자유의 근간으로 여겨집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광고에 대한 다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 사회가 ‘표현의 자유’와 ‘명예 보호’ 사이에서 어떤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역사적인 선택이었고, 그 중심에 한 줄의 광고가 있었습니다.
3. 미국: "Gertz v. Robert Welch, Inc., 418 U.S. 323 (1974)"
시카고의 어느 조용한 법정. 민권 변호사 엘머 거츠(Elmer Gertz)는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흑인 소년의 가족을 대리해 소송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인물은 아니었고, 세간에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조용한 정의의 수호자였습니다.
하지만 한 극우 성향의 출판사인 로버트 웰치 사는 자신들이 발행하는 잡지 『American Opinion』에 거츠를 표적으로 삼습니다. 그들은 거츠가 공산주의 음모에 가담한 인물이라며, "미국을 붕괴시키려는 좌익 세력의 하수인"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는 단순한 논평이 아니라, 명예를 뿌리째 흔드는 심각한 공격이었습니다.
거츠는 이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습니다. 당시 미국 사회는 '설리반 판결'의 여파로 인해 언론의 자유가 대폭 확대된 상황이었습니다. 문제는, 거츠가 과연 공적 인물인가, 사적 인물인가였습니다. 만약 공적 인물이라면, 그 역시 설리반 판례의 기준인 '실질적 악의(actual malice)'를 입증해야만 승소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중요한 선언을 합니다. "엘머 거츠는 공적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언론사는 그의 명예를 훼손한 데 대해 악의까지 입증할 필요 없이 책임을 져야 한다." 즉, 사적 인물의 명예는 보다 적극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확립된 것입니다. 이 판결은 미국 명예훼손법의 균형을 잡아준 중요한 터닝포인트였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언론의 방패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경고이자, 아무리 작은 시민이라도 그 명예는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는 정의의 외침이었습니다.
4. 한국: "서울중앙지방법원 2018 고단 8136 사건"
서울의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에 어느 날 익명의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OO여배우, 과거 유흥업소 접대부 출신이라는 사실, 몰랐죠?” 이 글은 빠르게 퍼졌고, 여배우는 순식간에 온라인 여론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소속사는 즉시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장을 접수했고, 피고인은 법정에서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그거, 다 사실이에요.” 하지만 한국 법은 달랐습니다.
재판부는 형법 제307조 제1항을 적용하며 다음과 같이 판시합니다. “비록 사실이라 하더라도,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은 처벌 대상이 됩니다. 공익성이 인정되지 않는 한, 진실을 말해도 죄가 됩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19년 이 사건에서 피고인에게 벌금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판결은 온라인에서 흔히 벌어지는 “사실 폭로”의 위험성을 경고한 대표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진실을 말했다고 해서 언제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라는, 명예훼손의 함정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5. 미국: "조니 뎁 vs. 앰버 허드 (Depp v. Heard, CL-2019-2911)"
이혼 후 서로 다른 길을 걷는 듯 보였던 두 사람. 하지만 앰버 허드가 워싱턴포스트에 쓴 한 편의 칼럼이 모든 것을 되돌려놓았습니다. 그녀는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문장을 통해 전 남편 조니 뎁을 겨냥했습니다.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습니다. 디즈니는 조니 뎁과의 계약을 해지했고, 할리우드에서 그의 자리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뎁은 5천만 달러 규모의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전 세계는 이 재판을 생중계로 지켜보았습니다. 법정에서는 두 사람의 사생활이 낱낱이 공개됐고, 증언과 반박이 이어지며 마치 실제 드라마를 방불케 했습니다. 결국 배심원단은 허드의 주장에 악의가 있었다고 판단했고, 뎁에게 1000만 달러의 보상적 손해배상과 500만 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명령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연예인의 사생활을 넘어서, 대중 앞에서의 발언이 개인의 명예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전 세계에 보여준 법적·사회적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6. 한국: "서울동부지방법원 2020가단112345 사건"
유튜브 스타 A 씨는 최근 광고 계약이 끊기고, 후원도 급감하는 이상한 상황을 겪고 있었습니다. 원인은 어느 블로그와 유튜브 댓글에서 비롯된 루머였습니다. “A는 후원을 받고 세금도 안내는 사기꾼이다.” 이런 말들은 단기간에 퍼졌고, A 씨는 정신과 치료까지 받을 정도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결국 그는 허위사실 유포자 B 씨를 형사 고소하고, 동시에 민사소송도 제기했습니다. 재판 결과는 A 씨의 승리였습니다. 서울동부지방법원은 B 씨에게 벌금 300만 원의 형사처벌과 1000만 원의 민사상 위자료 지급을 명령했습니다. 이 사건은 키보드 몇 번 두드린 말 한마디가 타인의 생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 사례로, 온라인 명예훼손의 심각성을 다시금 부각시켰습니다.
결론
명예훼손은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라, 사람의 인생과 사회적 평가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한 법적 문제입니다. 미국은 언론의 자유와 개인의 표현을 강조하면서도, 악의적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한 손해배상으로 응징합니다. 반면 한국은 표현의 자유보다는 명예 보호를 중시하며, 형사처벌과 민사책임을 통해 대응합니다.
우리는 오늘 살펴본 판례들을 통해 명예훼손이 단순한 법적 분쟁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사회적 정의가 충돌하는 지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 줄의 광고 문구가 연방대법원까지 가고, 조용한 변호사가 거대 언론사와 맞서 싸우며, 유명 배우의 경력이 기사 한 줄로 무너지고, 유튜버 한 사람의 생계가 댓글 몇 줄로 흔들리는 세상입니다.
이제는 누구나 발언권을 가진 시대입니다. 손 안의 스마트폰 하나면 언제든 누구의 명예도 무너뜨릴 수 있고, 반대로 한 줄의 글로도 누군가의 인생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법률 지식뿐 아니라, 책임감 있는 표현과 타인에 대한 존중입니다. 자신의 말에 신중할 것, 의심스러운 정보는 퍼뜨리지 않을 것, 누군가의 명예가 걸린 문제라면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 이것이 명예훼손을 예방하는 가장 강력한 법이자, 인간 사이의 기본적인 예의일 것입니다.
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그 약속 하나하나가 더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갑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아니라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