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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식 도장과 미국식 사인이 대비된 계약서 위 장면, 가운데 태극기와 미국 국기 포함된 법문화 비교 일러스트
    같은 계약, 다른 문화 미국과 한국의 계약법 차이

    계약서 문화 충돌, 미국에선 모든 걸 적는다

    계약이라는 말, 미국과 한국은 다르게 해석한다.

     

    계약은 두 사람이 어떤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로 서명하는 문서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종이에 도장을 찍는다고 해서, 그 계약이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과 한국은 ‘계약’이라는 개념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릅니다.

     

    미국에서는 계약서를 마치 전쟁 준비물처럼 철저하게 다룹니다. 한 문장, 한 단어, 한 쉼표까지 법적 책임을 묻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계약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명시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아직도 계약서가 “문서로 남기긴 하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의 일이니까”라는 정서에 기반할 때가 많습니다.
    형식적으로 서명은 하지만, 실제로 중요한 건 관계와 맥락, 업계의 관행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흔합니다. 그래서 계약서가 간단하고 구체적인 조항 없이 작성되는 일도 많습니다.

     

    이처럼 계약은 단지 종이 위의 문장이 아니라, 그 나라가 신뢰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문제를 어떻게 예방하고 해결하려 하는가에 대한 문화를 반영합니다. 이 글에서는 미국과 한국의 계약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 실제 계약서의 구성부터 분쟁 시 대응 방식까지 비교해 보겠습니다.

    미국식 계약 문화 – 모든 가능성을 문서로, 그리고 명확하게

    미국에서 계약서는 단지 “합의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법적 방패이자 무기, 그리고 위기 시 살아남기 위한 설계도입니다.
    커먼로(Common Law)를 따르는 미국의 법 체계에서는, 계약서에 쓰이지 않은 내용은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계약서는 철저하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미리 다 써두자”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단순히 납품일과 금액을 명시하는 수준이 아니라, 예상 가능한 거의 모든 시나리오에 대해 조항을 마련합니다.

    자주 들어가는 미국식 계약 조항들

    • Force Majeure 조항
      전쟁, 천재지변, 팬데믹 등 예외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계약 불이행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도록 명시

    COVID-19 이후 미국 계약서 대부분에 이 조항이 더 강화됨

    • Limitation of Liability (책임 제한 조항)
      일정 범위 이상의 손해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규정.

    예: “직접 손해 이외의 모든 간접적 손해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 Governing Law (준거법) & Venue (재판 장소)
      이 계약에 적용되는 법이 어떤 주(state)의 법인지, 그리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 어느 지역 법원에서 해결할지를 명확히 지정함

    예: “본 계약은 캘리포니아 법에 따라 해석되며, 분쟁은 샌프란시스코 카운티 법원에서 처리한다”

    • Dispute Resolution (분쟁 해결 절차)
      분쟁 시 소송이 아니라 중재(arbitration)나 조정(mediation)을 먼저 거치도록 설정

    예: “양 당사자는 소송 전에 30일간 상호 중재에 합의한다”

    계약서 = 신뢰의 증거

    미국에서는 계약서를 잘 쓰는 것 =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내용이 복잡하고 문장이 길다고 해서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만큼 신중하고 진지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계약 당사자들이 직접 내용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고, 법무팀 혹은 전문 계약 변호사(contract attorney)가 모든 내용을 검토합니다. 계약 체결 전 수일간 검토하는 것은 일상이며, 문구 하나 바꾸는 데도 “리스크 회피”라는 명확한 이유가 존재합니다.

    구두 약속은 증거가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구두 약속이나 이메일, 전화 통화 내용이 계약서와 일치하지 않으면 법적 효력이 없거나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계약 당사자들은 합의된 내용을 서면에 반드시 반영해야 하고, 작은 변경이 생겨도 별도 부속 계약서(addendum)를 통해 공식화합니다.

     

     

    한국식 계약 문화 – 간결함과 관행에 기대는 방식

    한국의 계약서는 상대적으로 간결합니다. 핵심적인 사항만 기재하고, 많은 부분은 업계 관행이나 상식에 맡깁니다. “말 안 해도 당연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계약서 밖에서 작동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문화는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유리하지만, 계약 당사자의 권리와 책임을 명확히 하기에는 부족한 점도 있습니다. 분쟁 발생 시 계약서보다는 상대방의 태도나 감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고, 소송보다는 타협을 선호합니다.

     

    한국에서 계약서는 종종 문제 생겼을 때 꺼내보는 최후의 수단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즉, 계약서를 철저하게 관리하기보다는, 신뢰 관계와 상식적인 협조를 더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활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계약서는 짧고, 심플하게

    한국의 계약서에는 핵심 내용만 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계약 당사자, 금액, 기간, 책임 범위 등 기본적인 조항만 명시하는 경우가 많고, 미국식 계약서처럼 모든 가능성을 나열하고 세부 조건을 덧붙이는 방식은 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실무 현장에서는 계약서가 아예 없이 구두 약속이나 이메일 합의만으로도 거래가 진행되기도 합니다. 특히 중소기업, 프리랜서, 지인 간의 협업에서는 계약서를 ‘형식적인 절차’로만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정도는 말 안 해도 알지 않나요?”

    한국의 계약 문화에서는 불문율이라는 개념이 존재합니다. 계약서에 명확히 적혀 있지 않아도, 업계 관행이나 이전 경험을 통해
    “그런 건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라는 기대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 납기일을 며칠 넘겨도 전화 한 통으로 조율하는 경우
    • 작업 범위가 명시되지 않았더라도 "보통 그 정도는 포함이지"라며 진행하는 경우
    • 수정 요청이 반복되어도 “기왕이면 잘 마무리하자”는 정서로 받아들이는 경우

    이러한 문화는 유연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계약 당사자의 책임과 권리를 모호하게 만들거나 분쟁 발생 시 기준이 흐려질 수 있는 단점도 동반합니다.

    법보다 감정이 앞서는 경우도

    한국에서는 분쟁이 발생해도 법적 책임을 따지기보다는 “상대방의 태도”에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계약을 어긴 당사자가 사과를 하고 성의를 보이면 분쟁이 커지지 않기도 하고, 반대로 계약 조건은 지켰더라도 “무성의했다”, “말이 없었다”는 이유로 신뢰가 깨지는 일도 있습니다. 또한, 법적 절차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하고 “그래도 사람 사이인데…”라는 정서로 조율이나 타협을 우선시하는 문화도 강합니다. 이는 공동체 중심의 사회 구조와 상호배려를 중시하는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관행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갈등

    문제는 미국 기업과의 계약에서 이런 문화가 충돌할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 측은 구두로 이야기된 내용을 이행할 줄 알았는데, 미국 측은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니 이행하지 않겠다”라고 나오면 그제서야 서면 계약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실무에서 나타나는 충돌 – 왜 다툼이 생기는가

    한국과 미국, 계약 문화가 다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도, 실제 일하는 현장에서 부딪히는 순간엔 훨씬 더 크게 체감하게 됩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대한 해석 차이로 수천만 원의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고, “믿고 맡겼는데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다”는 정서적 충격이 따라오기도 합니다.

    구두 약속 vs 문서 중심: 약속을 바라보는 기준이 다르다

    Case 1. 구두 약속을 믿은 한국 기업, 계약서가 전부라는 미국 파트너
    어떤 한국 중소기업은 미국의 도매업체와 공급 계약을 맺고, 가격 인하에 대한 구두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실제 계약서에는 기존 단가가 그대로 기재되어 있었고, 분쟁 발생 후 미국 업체는 “서면에 없는 조건은 합의된 바 없다”며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국 측은 손해를 감수하고 거래를 종료해야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구두 합의나 이메일은 보조적인 자료일 뿐, 계약서 본문에 적힌 것만이 법적 효력을 가집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야기했잖아요”라는 정서적 호소가 분쟁 해결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변경된 조건은 반드시 ‘문서’로 남겨야 한다

    Case 2. 납기 연장, 말로는 합의했지만…

    한국 스타트업 A는 미국 바이어 B와 제품 납품 계약을 체결했지만, 예상치 못한 생산 문제로 납기를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이어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알겠다”는 말을 들었기에 안심했지만, 이후 계약 위반으로 소송 통보를 받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변경 사항은 반드시 추가 계약서(Addendum)나 서면 확인 문서로 남겨야 법적으로 인정됩니다.
    “말은 말이고, 증거는 문서다”라는 것이 미국식 법 해석의 핵심입니다.

    이의 제기 속도도 다르다

    한국은 분쟁이 발생하면 일단 서로 연락해 조율하려는 태도가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상황이 명확하면 변호사 선임과 법적 통보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차이 때문에 한국 기업은 “왜 갑자기 소송이냐”는 당혹감을 느끼고, 미국 기업은 “왜 미리 조심하지 않았느냐”는 불만을 갖게 됩니다.

    미국의 계약서는 다툼을 ‘미리 예방’하는 구조

    이런 갈등을 줄이기 위해 미국의 계약서는 이행 조건, 위반 시 책임, 수정 절차, 해결 방법을 세세하게 조항으로 정리해 둡니다.
    이 조항 하나하나가 문제 발생 시 양측 모두를 지켜주는 안전장치 역할을 합니다.

     

     

    변화하는 한국의 계약 문화 – 신뢰를 문서로 남기는 시대

    이제 한국도 글로벌 거래가 많아지면서 계약 문화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 IT기업, 프리랜서 시장에서는 미국식 계약 관행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으며, 계약서를 잘 쓰는 것이 상호 신뢰의 표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는 표준계약서를 도입하고, 계약서 자동화 시스템도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계약은 사람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사람 사이의 신뢰와 상식에 기대는 계약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국제 거래와 디지털 플랫폼이 일상이 되면서 이제 한국도 점차 “계약서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스타트업과 글로벌 기업을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특히 해외 투자를 받거나 외국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는 스타트업과 테크기업들은 미국식 계약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계약 체결 전, 법무팀이 꼼꼼하게 조항을 검토하고 변호사들이 초안을 작성하거나 계약서 내용을 해석하는 일이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닙니다. 국제 비즈니스에서는 관행이나 통념이 통하지 않으며 리스크는 책임으로, 책임은 비용으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계약서에 조항이 많을수록 “상대방을 못 믿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살 수 있었지만, 요즘은 오히려 계약서를 정교하게 작성하는 것이 ‘프로페셔널한 태도’라는 인식이 강해졌습니다. 특히 MZ세대는 일을 시작할 때부터 업무 계약, 프리랜서 계약, NDA(비밀유지계약) 등을 자연스럽게 요구하고, 스스로 문서로 남기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공공기관과 기업도 계약 표준화에 힘쓰고 있다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도 표준계약서 양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법무 컨설팅이나 계약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해
    계약 내용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분쟁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계약을 사람 간의 신뢰에서 법적 신뢰로 전환하는 흐름이 이제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계약은 더 이상 사람을 의심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써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방에게 불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의 약속을 정확하게 지키고 싶습니다”라는 존중의 표현이 됩니다.

    결론

    계약서를 바라보는 시선은 단지 서류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신뢰를 어떤 방식으로 세우고, 위험을 어떻게 관리하며, 책임을 어디까지 공유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문화적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미국은 계약서를 통해 모든 가능성과 리스크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모든 조건을 명시하고, 각 조항마다 법적 책임의 경계를 명확히 합니다. 이는 불확실한 미래를 통제하는 장치로서의 계약을 보여줍니다.

     

    반면 한국은 지금까지 신뢰와 유연성을 전제로 한 계약 문화에 익숙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대화를 통한 조율이나 관행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고, 계약서는 하나의 참고 자료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한국도 바뀌고 있습니다. 글로벌 거래가 일상화되고, 예상치 못한 분쟁이 빠르게 법적 문제로 번지는 현실에서 계약서는 더 이상 단순한 서류가 아니라, 신뢰를 지키는 가장 명확한 표현 수단이자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한 안전망이 되고 있습니다.

    • 미국에서 계약은 "적는 문화"입니다. 빠짐없이 쓰고, 명확히 쓰고, 남겨두는 문화.
    • 한국에서 계약은 "기대는 문화"였습니다. 상식과 사람 사이의 신뢰, 업계의 관행에 기대는 문화.

    이제 우리는 두 문화를 모두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계약을 대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법적 분쟁을 줄이고, 신뢰를 지키며, 오래가는 관계를 만드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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